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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 러너 인구가 천만 명을 돌파하면서 전국 곳곳에서 마라톤 대회가 급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안전관리 시스템은 여전히 권고 수준에 머물러 있고, 응급 대처 매뉴얼이 부실해 대형 사고 위험이 커지고 있습니다. 2025년 현재, 한국의 마라톤 문화는 양적 성장의 정점을 찍고 있지만, 동시에 안전관리의 사각지대라는 숙제를 안고 있습니다.

    마라톤의 모습

    천만 러너 시대의 도래 – 폭발적으로 늘어난 마라톤 인구

    ‘달리기’는 이제 개인의 취미를 넘어, 사회적 트렌드가 되었습니다. 코로나19 이후 건강과 체력 관리에 대한 인식이 강화되면서, 마라톤·하프마라톤·10km 달리기 등 각종 러닝 이벤트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 자료에 따르면, 2024년 국내 등록 마라톤 참가 인구는 약 1,080만 명에 달했습니다. 이는 2020년 9000여 명 수준에서 불과 4년 만에 100배 이상 증가한 수치입니다. 그중 절반 이상은 30~40대 직장인으로, ‘퇴근 후 러닝’, ‘주말 마라톤 동호회’, ‘건강 챌린지’ 등 일상 속 운동 문화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특히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등 광역시뿐 아니라 소도시 지자체까지 자체 마라톤 대회를 개최하면서, 러닝은 이제 전국민적 스포츠로 확산되었습니다. 국내에서 2024년 한 해 동안 열린 공식 마라톤 대회는 254회로, 이는 2020년(19회)에 비해 무려 13배 증가한 규모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건강한 시민 사회’의 긍정적 지표로 해석되지만, 대회 준비 및 안전 규정은 이에 미치지 못하는 현실이 동시에 드러나고 있습니다.

    급증하는 대회, 그러나 안전 시스템은 제자리

    대회 수와 참가 인원이 늘어나면서, 사고 발생 건수도 급격히 증가했습니다.
    경찰청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2020년 이후 전국 마라톤 대회에서 보고된 사고는 총 179건, 그중 63건(약 40%)이 2024년 한 해에 집중되었습니다. 이 가운데 70%는 탈수, 심정지, 골절, 교통 충돌 등 인명 사고였습니다. 하지만 대회의 60% 이상이 의료 인력 배치 의무 기준 미달 상태였으며, 응급 대처 매뉴얼을 갖춘 경우는 절반에 불과했습니다. 문제는 주최 측의 대부분이 지자체나 민간단체, 러닝클럽 중심의 ‘비전문 주최자’라는 점입니다.
    이들은 비용 절감과 홍보 효과에 치중하다 보니, 필수 안전요원이나 구조 장비 배치를 생략하는 사례가 빈번합니다. 예를 들어, 한 지역 마라톤 대회에서는 3만 명이 참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의료진이 단 2명뿐이었고, 구급차는 행사장에 한 대만 배치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발생한 심정지 사고는 골든타임을 놓쳐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전문가들은 경고합니다.

    “마라톤 대회는 단순한 체육행사가 아니라 대형 인파가 모이는 사회적 이벤트입니다. 교통, 기상, 응급, 인파 통제 등 종합 관리 체계가 필수입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많은 주최 측이 안전관리비를 ‘부대비용’으로 인식하며, 참가비의 10% 미만만을 안전 예산으로 배정하고 있습니다.

    제도적 공백 –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구조

    현재 한국의 마라톤 대회는 스포츠행사 관리법상 ‘자율 행사’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이는 주최 측이 안전관리 규정을 ‘권고’만 받는 구조로, 의무 조항이 없습니다. 즉, 사고가 발생해도 법적으로 주최자의 책임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2025년부터 ‘스포츠행사 안전관리 지침’ 개정안을 추진 중입니다.
    개정안에는 ▲참가자 1000명 이상 대회 시 구급차 2대 이상 의무 배치, ▲의료진 5인 이상 상시 대기, ▲기상 악화 시 대회 중단 권한을 주최자에게 부여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현장의 반응은 엇갈립니다.
    일부 주최자는 “규제 강화는 대회 운영비 부담을 가중시킨다”고 우려하고, 안전 전문가들은 “비용보다 생명이 우선”이라고 강조합니다. 특히 기상 이변이 잦아진 최근 몇 년간, 폭염과 미세먼지 속에서 열린 마라톤은 ‘건강 스포츠’가 아닌 위험한 체력 소모 행사로 변질되고 있습니다. 2024년 7월 부산 마라톤에서는 체감온도 35도에서 10km 완주 도중 쓰러진 참가자 3명이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그중 1명이 사망했습니다.

    세계 주요국의 안전 운영 사례

    한국과 달리 해외 주요국은 이미 법적 안전 기준을 의무화했습니다.

    • 미국 : 보스턴, 뉴욕, 시카고 마라톤 등 대형 대회는 모두 의료 전문인력과 응급차 배치를 법으로 규정. 참가자 1000명당 1명의 의무 의료인 배치가 원칙입니다.
    • 영국 : 런던 마라톤은 경찰·소방·보건당국이 공동으로 ‘비상대응 매뉴얼’을 운영하며, 모든 참가자는 사전 건강검진 확인서를 제출해야 합니다.
    • 일본 : 도쿄 마라톤은 참가비의 15%를 안전관리 예산으로 지정하며, 대회 전날까지 모든 코스의 도로 위험 요인을 점검합니다.

    이와 비교하면 한국은 여전히 ‘안전관리 자율화 국가’로 분류됩니다. 안전관리의 법적 의무화는 아직 초기 단계이며, 대부분의 규정은 ‘행정 권고’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앞으로의 과제 – ‘참가자 중심 안전 시스템’ 구축

    마라톤은 단순한 체육 활동이 아니라, 참가자의 생명과 직결된 공공 행사입니다.
    따라서 주최자 중심의 운영에서 벗어나, 참가자 중심의 안전 설계가 필요합니다.

    1. AI 기반 실시간 코스 모니터링 시스템 도입
      → GPS·웨어러블 센서로 참가자의 심박수, 체온, 이동속도 등을 실시간 감시하여 위험 징후를 즉시 탐지.
    2. 응급의료 전문 인력 양성 및 배치 의무화
      → 지역 대학·의료기관과 연계한 응급대응 인턴십 프로그램을 활성화.
    3. 기상 상황 연동형 대회 중단 시스템 구축
      → 폭염·미세먼지 등 위험 기상 발생 시, 자동 경보 및 코스 단축 조치 시행.
    4. 참가자 사전 건강검진 제도화
      → 일정 거리 이상 종목은 건강 이상자 참여 제한, 보험 의무 가입 제도 시행.

    이러한 시스템이 정착되어야 비로소 한국 마라톤 문화가 ‘참여의 축제’에서 ‘안전한 스포츠 문화’로 진화할 수 있습니다.

     

    한국은 이제 명실상부한 ‘천만 러너 시대’에 진입했습니다. 그러나 그 성장의 이면에는 준비되지 않은 안전 시스템이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존재합니다. 달리기는 자유로움과 건강의 상징이지만, 제대로 된 관리와 시스템이 없다면 그 자유는 위험으로 바뀝니다. 따라서 정부, 지자체, 주최단체, 시민 모두가 함께 ‘안전한 달리기 문화’를 만드는 책임 공동체로 나아가야 합니다. 마라톤의 본질은 ‘속도’가 아니라 ‘지속’입니다.

     

    참가자의 생명과 안전이 보장될 때, 비로소 한국의 러닝 문화는 진정한 의미의 완주를 향해 달릴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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